캐나다 뉴펀들랜드섬의 그레이트노던반도 끝자락, 벨아일 해협에 면한 에파브만 가까이에 좁은 단구가 있습니다. 단구에서는 이탄 습지와 작은 개울이 내려다보이고, 그 위에서 11세기 바이킹 정착지 한 곳의 터가 통째로 발굴되었습니다. 이곳이 랑스 오 메도즈 국립 사적지입니다.
유적은 나무 뼈대에 뗏장을 덮은 건물 여덟 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같은 시기 노르드인이 살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건물과 같은 방식으로 지은 집들입니다. 공식 설명은 이곳을 두고 유럽인이 북아메리카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이른 증거라고 소개합니다.
지금 이 일대는 대부분 탁 트인 풀밭이지만, 1000년 전에는 배와 집을 짓고 철을 뽑기에 알맞은 숲이 있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온 사람들이 이곳에 남긴 흔적은,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500년 가까이 앞선 유럽인의 아메리카 도착을 증언합니다.
이름에도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랑스 오 메도즈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섞인 이름으로, 풀밭이 있는 만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프랑스어 '해파리 만'이 바뀌었다는 설과, 1862년 프랑스 해군 해도에 적힌 '메데 만'에서 왔다는 설이 있어 유래는 아직 논쟁거리입니다.
🏆 왜 세계유산인가 — 인류가 인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
"랑스 오 메도즈는 북아메리카에서 바이킹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이자 유일한 유적이며, 신대륙에 유럽인이 정착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이른 증거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인류의 이주와 발견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이정표다."
랑스 오 메도즈는 1978년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습니다. 등재 기준으로는 단 하나, 인류의 이주와 발견의 역사에서 이곳이 차지하는 자리가 제시되었습니다. 레이프 에릭슨을 비롯한 노르드 탐험가들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떠나 대서양을 건너 서쪽의 새 땅을 찾아 나선 항해를, 공식 설명은 그 역사의 중요한 성취로 평가합니다.
랑스 오 메도즈가 지닌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첫째, 유일한 바이킹 유적 입니다. 북아메리카에서 바이킹이 세웠다고 알려진 곳은 이곳이 처음이자 유일합니다. 그린란드 밖의 북아메리카에서 노르드인의 유적으로 확인된 곳 역시 이곳 하나뿐입니다.
둘째, 신대륙의 가장 이른 유럽인 흔적 입니다.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거의 500년 앞서 유럽인이 신대륙을 탐험하고 정착했음을 알려 줍니다. 콜럼버스 이전 유럽인의 탐험과 정착이 닿은 것으로 알려진 가장 먼 자리이기도 합니다.
셋째, 사가와 맞닿은 고고학 입니다. 남아 있는 흔적은 빈란드 사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들어맞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 증거도 넉넉합니다. 사가 속 서쪽 항해가 땅속의 증거와 만난 셈입니다.
📜 사가 속 빈란드, 그리고 1960년의 발견
노르드인이 서쪽의 땅을 찾아간 이야기는 두 편의 아이슬란드 사가, 「그린란드인의 사가」와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에 전합니다. 둘을 묶어 빈란드 사가라 부르며, 13세기에 글로 적혔습니다. 사가는 그린란드의 노르드인이 서쪽에서 찾아낸 땅을 빈란드라 부르고 정착하려 했으나, 저희끼리의 다툼과 원주민과의 유혈 충돌 끝에 뜻을 접었다고 전합니다.
빈란드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서는 그보다 앞선 1073년의 것입니다. 독일 성직자 브레멘의 아담이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들의 역사를 쓰면서, 덴마크 왕에게서 들은 서쪽 바다의 섬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포도덩굴이 저절로 자라서 빈란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섬입니다.
사가 속 이야기가 실제 땅과 이어진 것은 1960년의 일입니다. 랑스 오 메도즈의 작은 어촌에 사는 조지 데커가 노르웨이 탐험가 헬게 잉스타드를 마을 근처의 둔덕으로 안내했습니다. 주민들이 '옛 인디언 야영지'라 부르던 풀 덮인 둔덕은 집터처럼 보였습니다.
헬게 잉스타드와 고고학자인 아내 안네 스티네 잉스타드는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일곱 차례 발굴을 벌여 건물 여덟 채의 터를 찾아냈습니다. 부부는 건물의 구조와 유물을 1000년 무렵의 그린란드·아이슬란드 유적과 견주어 이곳이 노르드인의 정착지임을 밝혔습니다. 뒤이어 캐나다 국립공원청이 두 차례 더 발굴을 맡겼는데, 1973년부터 1975년까지는 벵트 쇤바흐가, 1976년에는 비르기타 월리스가 이끌었습니다.
연대도 좁혀졌습니다. 탄소 연대 측정은 990년에서 1050년 사이, 평균 1014년을 가리킵니다. 2021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는 서로 다른 나무 시료 세 점의 나이테를 분석하고 993년 대기 중 탄소-14 농도의 이상 현상을 기준으로 삼아, 1021년에 이곳에서 노르드인이 활동했음을 짚어 냈습니다.
다만 사가 속 어느 거처가 이곳인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레이프 에릭슨이 세운 레이프스부디르와 또 다른 거처 호프가 저마다 랑스 오 메도즈로 지목되었지만, 그런 주장에는 반론도 따랐습니다.
🏛️ 뗏장을 덮은 여덟 채의 집
나무 뼈대에 뗏장을 덮은 여덟 채 가운데 살림집이 셋, 대장간이 하나, 작업장이 넷입니다. 건물들은 같은 시기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노르드인 거주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발견 뒤 이어진 폭넓은 고고학 조사로 짓는 방식도 드러났습니다. 나무 뼈대 위에 독특한 형태의 박공지붕을 얹고, 둘레의 이탄 습지에서 떠낸 뗏장으로 덮었습니다. 방의 배치와 화덕, 출입구 같은 개구부도 노르드 건축의 특징을 따랐습니다.
가장 큰 살림집은 28.8미터에 15.6미터 크기로,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공식 설명은 이 유적이 자리와 주변 환경, 형태와 설계, 재료와 물질의 모든 면에서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발굴에서는 나무와 청동, 뼈, 돌로 만든 유물 약 800점이 나왔습니다. 이 유물들은 유적이 노르드인의 것임을 확인해 주고, 이곳에 머문 사람들의 일과 생활을 알려 줍니다. 돌로 만든 기름 등잔, 숫돌, 청동 옷핀, 날레빈딩 뜨개에 쓰던 뼈바늘, 실을 잣던 가락의 조각처럼 노르드인의 일상에서 흔히 쓰던 물건들입니다. 가락과 바늘이 나온 것은 이곳에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머물렀음을 시사합니다.
⚡ 철을 뽑고 배를 고치던 기지
유물은 이곳에서 벌어진 일도 들려줍니다. 공식 설명은 철 생산과 목공의 흔적을 들며, 그 목공은 배를 고치는 데 쓰였을 것으로 봅니다. 대장간 건물에서는 화덕과 쇠찌꺼기가, 목공 작업장에서는 나뭇조각 부스러기가 나왔습니다. 닳은 리벳이 나온 배 수리 전용 구역도 확인되었습니다.
이 야영지를 쓴 사람들이 더 남쪽까지 항해했다는 흔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음식 찌꺼기 속의 버터너트입니다. 버터너트는 뉴브런즈윅보다 북쪽에서는 저절로 자라지 않으므로, 노르드인이 이것을 구하러 남쪽까지 다녀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고고학 증거는 이곳이 남쪽 지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 탐험의 전진 기지였음을 시사합니다.
노르드인이 카리부와 늑대, 여우, 곰, 스라소니, 담비, 여러 새와 물고기, 물범, 고래, 바다코끼리를 사냥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이곳에 몇 명이 머물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살림집은 30명에서 160명을 들일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당시 그린란드의 인구 전체가 약 2,500명이었으니, 그린란드 노르드 정착지 인구의 10%에도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 이곳에 있었던 셈입니다.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를 두고도 해석이 갈립니다. 인류학자 존 스타인버그는 노르드인이 약 20년 동안 적어도 간헐적으로 머물렀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019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연구는 이곳의 노르드인 활동이 길게는 한 세기 동안 이어졌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엘리너 배러클러프는 무덤이나 농사, 가축 우리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곳이 영구 정착지가 아니라 한때 쓰인 배 수리 시설이었고, 사람들이 질서 있게 떠났다고 해석합니다.
🧐 다시 흙을 덮어 지키는 유적
발굴이 한 차례 끝날 때마다 유적은 다시 흙으로 덮였습니다. 남은 흔적이 삭아 없어지지 않도록 다시 묻어 보존하는 방식입니다. 공식 설명은 유적이 안정된 상태이며, 알려졌거나 예상되는 위협이 없고, 개발이나 방치로 인한 피해도 겪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국립 사적지의 면적은 7,991헥타르입니다. 그 경계는 노르드인의 유적이 남은 구역보다 훨씬 넓게 그어져, 이 지역에서 알려진 노르드인의 흔적을 모두 품고 유산의 가치를 이루는 요소들을 넉넉히 감쌉니다.
랑스 오 메도즈는 1975년 캐나다 연방 정부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협정으로 국립 사적지가 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두 정부가 함께 협의해, 사적지와 맞닿은 마을과 지역의 앞날의 개발을 공동으로 계획하도록 정했습니다. 국제적으로 중요한 유산의 이웃이라는 사실에 걸맞은 개발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적은 1998년의 캐나다 국립공원청법과 2000년의 캐나다 국립공원법으로 보호되며, 관리 계획은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새로 고칩니다. 캐나다 국립공원청은 방문과 보존을 함께 관리하고, 바이킹 기지에서 나온 유물은 알맞은 환경에서 전시하거나 보관합니다.
✍️ 여러 사람이 머물다 간 땅
랑스 오 메도즈는 노르드인만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노르드인이 오기 전, 다섯 원주민 집단이 이곳에 머문 흔적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약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장 두드러진 앞선 거주자는 노르드인보다 약 300년 앞서 이곳에 머문 도싯 사람들입니다.
노르드인이 떠난 뒤에는 1200년 무렵부터 1500년 무렵까지 리틀 패시지 전통의 사람들이 머물렀습니다. 어느 집단도 노르드인과 같은 시기에 이곳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적지 안, 노르드인 유적의 남서쪽에는 원주민 사냥 야영지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사적지에서는 노르드인 건물 일곱 채의 터를 볼 수 있고, 그 북쪽에는 20세기 후반에 해설용으로 새로 지은 복원 건물들이 서 있습니다. 관리 계획은 이곳이 지정된 까닭을 대중에게 제대로 전하도록 요구합니다. 대서양 이쪽의 원주민과 저쪽에서 건너온 노르드인이 서로 다른 시대에 같은 해안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이 좁은 단구가 전하는 이야기의 폭을 넓혀 줍니다.
📚 정리 — 랑스 오 메도즈가 남긴 것
- 북아메리카 유일의 바이킹 유적 — 바이킹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처음이자 유일한 곳입니다.
- 뗏장 집 여덟 채 — 살림집 셋, 대장간 하나, 작업장 넷이 그린란드·아이슬란드와 같은 양식으로 섰습니다.
- 빈란드 사가 — 레이프 에릭슨과 노르드 탐험가들의 서쪽 항해 이야기와 유적이 들어맞습니다.
- 1021년의 흔적 — 나이테 분석이 노르드인이 이곳에서 활동한 해를 짚어 냈습니다.
- 배를 고치던 기지 — 철 생산과 목공, 버터너트가 남쪽으로 이어진 항해를 알려 줍니다.
- 다시 덮은 땅 — 발굴 뒤 흙을 덮어 보존하고, 7,991헥타르의 넓은 경계로 감쌉니다.
에파브만을 내려다보는 좁은 단구에서, 사가 속 이야기와 땅속의 증거는 1960년에야 서로를 만났습니다. 지금 풀밭 아래 다시 잠든 집터들은 대서양을 건넌 노르드인의 항해를 그 자리에서 증언하며, 그보다 앞서고 뒤선 원주민의 자취와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