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서부의 도시 아헨은 1세기부터 온천지로 쓰여 왔습니다. 프랑크 왕실의 영지였던 이 땅을
카롤루스 대제는 가장 아끼는 거처로 삼았습니다.
그가 이 자리에 세운 것이 궁정 예배당입니다. 793년에 시작해 813년에 마무리된 이 건물은
지금 아헨 대성당의 한가운데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뒷날 중세를 지나며 고딕 성가대석과
여러 부속 예배당이 덧붙었지만, 처음의 팔각형 몸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건물 하나가 시대의 이름을 얻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아헨의 예배당은 서방의 통일과, 카롤루스
대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정신적·정치적 부흥을 상징하는 건축으로 읽힙니다. 짓는 일이 곧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814년, 카롤루스 대제는 자신이 세운 이 예배당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1531년까지
독일 왕들이 이곳에서 관을 받았습니다.
🏆 왜 세계유산인가 — 인류가 인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대리석 기둥, 청동 문,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돔의 거대한 모자이크와
함께, 아헨의 궁정 예배당은 처음부터 예외적인 예술적 창조로 받아들여졌다."
아헨 대성당은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습니다. 그해 처음으로 목록에 오른
열두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유네스코가 이 건물에 적용한 등재 근거는 네 가지인데,
하나씩 풀어 보면 이 예배당이 왜 특별한지가 드러납니다.
첫째, 예술적 창조로서의 예외성입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산 대리석 기둥, 청동으로
만든 문, 돔을 덮었던 거대한 모자이크. 이 예배당은 지어진 순간부터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여겨졌습니다. 무엇보다 이 건물은 고대 이후 알프스 북쪽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볼트 구조였습니다.
돌로 천장을 덮는 기술이 오랫동안 끊겼던 땅에서, 다시 하늘을 돌로 가린 첫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규모와 높이는 그 뒤로 200년이 넘도록 알프스 북쪽에서 넘어서는 건물이 없었습니다.
둘째, 뒤따르는 건축에 미친 영향입니다. 고전과 비잔티움의 자취를 함께 지닌 이 예배당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지나 중세 초입까지 종교 건축의 본보기로 남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
건물을 본떠 짓거나 흉내 냈습니다.
셋째, 건축 유형의 뚜렷한 사례라는 점입니다. 중앙 집중식 평면에 트리뷴을 둘러 세운
궁정 예배당이라는 계보 안에서, 아헨의 예배당은 그 유형의 뛰어나고 뚜렷한 본보기로 꼽힙니다.
넷째, 역사가 이 건물에 걸어 둔 무게입니다. 황제의 예배당을 짓는다는 일 자체가 서방의
통일과 부흥을 뜻했고,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이곳에 묻힌 뒤로 1531년까지 독일 황제들이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여기에 대성당 보물고가 지닌 고고학적·미학적·역사적 가치가
더해집니다.
📜 온천 마을에서 순례의 도시로
아헨의 시작은 물이었습니다. 1세기부터 온천지로 쓰이던 이 프랑크 왕실 영지를 카롤루스 대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처로 삼으면서, 마을은 제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황궁 구역의 주요 건물은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대관식 홀로, 지금의 시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가 궁정 예배당, 곧 오늘의 아헨 대성당입니다. 예배당 서쪽의 아트리움과 주랑
현관은 황제의 거처로 이어졌습니다. 정치의 공간과 신앙의 공간이 한 몸으로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설계는 메츠의 오도가 맡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8세기가 저물 무렵 아헨에는 주조소가 들어섰습니다. 문과 난간은 물론 말과 곰의 조각상까지
여러 청동 기물이 이곳에서 부어졌습니다. 건물을 짓는 일과 그 안을 채우는 일이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진 셈입니다.
814년, 이 건물을 세운 사람이 이 건물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881년 바이킹의 습격으로 예배당은 큰 피해를 입었고, 983년에 이르러서야 복구되었습니다.
전환점은 1165년에 찾아왔습니다. 카롤루스 대제가 성인으로 선포되면서 예배당이 순례지가
된 것입니다. 몰려드는 순례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355년 고딕 양식의 성가대 홀이 덧붙었고,
카롤루스 대제 서거 600주년에 맞춰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유리 예배당이 축성되었습니다.
쿠폴라와 여러 예배당, 첨탑이 그 뒤로도 차례차례 더해졌습니다.
🏛️ 여덟 모서리 위에 얹은 돔
예배당의 평면은 팔각형입니다. 그 둘레를 측랑이 감싸고, 그 위로 트리뷴이 한 층 더 돌아가며,
꼭대기는 돔이 덮습니다. 동방 로마 제국 교회들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특히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이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안쪽 팔각형의 지름은 14.46미터입니다. 굵은 피어들이 그 위에 팔각의 볼트를 떠받치고,
바깥으로는 열여섯 모서리의 낮은 교차 볼트가 한 바퀴 돌며 높은 갤러리를 받칩니다.
이 위층은 호흐뮌스터, 곧 '높은 교회'라고 불렸습니다.
내부는 위아래 두 켜로 나뉩니다. 아래층 아치는 위층의 절반쯤 되는 높이라 다부지고 묵직해
보이고, 두 층 사이는 넓은 코니스가 갈라 놓습니다. 갤러리의 아치 위로는 창이 뚫린 팔각 드럼이
솟고 그 위에 쿠폴라가 얹힙니다. 빛은 세 켜로 배치된 반원 아치창을 통해 들어옵니다.
기둥들은 이 자리에서 깎은 것이 아닙니다. 위층 갤러리를 나누는 기둥은 쾰른의 성 게레온
성당에서 왔고, 카롤루스 대제는 8세기 말 로마와 라벤나에서도 고대의 기둥들을 옮겨 오게
했습니다. 이 기둥들은 한 번 아헨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1794년 프랑스가 라인란트를
점령했을 때 파리로 실려 갔고, 1815년에 루브르에 남아 있던 것 가운데 많게는 절반이 되돌아왔습니다.
1840년대에 제자리를 찾았고, 사라진 것은 오덴베르크 화강암 기둥으로 대신했습니다.
갤러리의 아치 사이에는 1미터 높이의 카롤링거 청동 난간이 둘러 있습니다. 1200년 전
로마의 방식을 따라 한 덩어리로 부어 만든 것입니다.
돔의 안쪽은 본래 거대한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습니다. 자주색 옷을 입고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를
네 복음서의 상징과 묵시록의 스물네 장로가 둘러싼 그림이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1880년에서 1881년 사이에 새로 만든 것입니다.
제단을 마주 보는 갤러리에는 황제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거기 놓인 카롤링거 석조 옥좌는
중세부터 1531년까지 신성로마제국 왕들의 대관 좌석이었습니다. 돌 의자 하나가 수백 년 동안
같은 일을 했습니다.
⚡ 금과 은과 대리석으로 남은 것
아헨 대성당의 보물고는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고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여기 놓인 물건들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기술과 신앙을 보여 줍니다.
로타르 십자가는 서기 1000년 무렵에 만들어졌습니다. 금으로 짜고 보석을 박아 넣은
십자가입니다. 짙푸른 벨벳에 진주를 수놓은 제의도 함께 전해집니다.
카롤루스 대제의 얼굴을 은과 금으로 빚은 흉상 성유물함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세르피나가 납치되는 장면을 부조로 새긴 대리석 석관이 남아 있는데, 한때 카롤루스 대제의
시신이 이 석관 안에 있었습니다.
🧐 폭격을 견디고 30년을 고쳤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아헨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의 폭격과 포격이 도시를 때렸고, 뒤이어
미군이 시가로 들어오면서 지상전까지 벌어졌습니다. 대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기본 구조는 살아남았습니다. 전쟁 중에 예술품 상당수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두었고, 옮길 수 없는 것들은 성당 안에서 따로 보호했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이 있습니다. 14세기 성가대 홀의 유리, 네오고딕 양식의 제단, 회랑의 큰 부분,
그리고 성물 예배당은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되었습니다.
복구는 한 번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끊겼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고,
들어간 비용은 4천만 유로로 추산됩니다. 한 건물을 되살리는 데 한 세대가 걸린 것입니다.
✍️ 덧붙었으나 흐려지지 않았다
중세를 지나며 아헨 대성당에는 고딕 양식의 성가대석이 붙고 여러 예배당이 잇달아 더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대성당은 그렇게 여러 시대가 겹쳐 쌓인 결과물입니다.
그런데도 처음의 궁정 예배당은 뒤에 붙은 것들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독특한 구조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여러 차례의 증축에도 하나의 균질한 핵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덧붙이는 일이 원래의 것을 지우지 않은 드문 사례입니다.
유네스코는 이 유산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었고 규모도
적절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형태와 설계, 재료와 실체, 그리고 교회이자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라는 쓰임과 기능이 모두 바뀌지 않은 채 이어져 왔다는 점도 함께 인정되었습니다.
보존은 법과 조직이 함께 맡습니다. 대성당은 1980년 3월 11일 제정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기념물 보호·보존법에 따라 지정 기념물로 관리되며, 유산 안팎의 보존과 건축 행위는 이 법과
지구단위계획의 규제를 받습니다. 완충 구역 역시 같은 법에 따라 기념물 보호 구역으로 지켜집니다.
실무는 대성당 참사회 아래의 대성당 건축 관리국이 맡고, 지역과 지방의 기념물 보존 당국과
협의하며 일합니다. 유지·보존 조치는 운영위원회가 해마다 검토하고 필요하면 고쳐 나갑니다.
📚 정리 — 아헨 대성당이 남긴 것
- 793~813년 — 카롤루스 대제가 자신의 궁정 예배당으로 지었고, 지금도 대성당의 핵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 알프스 북쪽 최초의 볼트 — 고대 이후 끊겼던 돌 천장 기술이 이 건물에서 다시 이어졌고, 그 규모는 200년 넘게 견줄 상대가 없었습니다.
- 여덟이라는 질서 — 지름 14.46미터의 팔각형을 열여섯 모서리의 낮은 볼트가 감싸고, 그 위로 갤러리와 쿠폴라가 얹힙니다.
- 1531년까지의 대관식 — 카롤링거 석조 옥좌에서 신성로마제국 왕들이 관을 받았습니다.
- 돌아온 기둥들 — 1794년 파리로 실려 갔다가 1815년 많게는 절반이 되돌아와 1840년대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 30년의 복구 —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견딘 뒤 4천만 유로를 들여 되살렸습니다.
아헨 대성당을 보는 일은 한 건물을 보는 일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시간을 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로마와 라벤나에서 옮겨 온 고대의 기둥, 카롤링거의 청동, 중세의 고딕, 19세기의 모자이크가
한자리에 있습니다. 바이킹의 습격과 20세기의 폭격을 지나고도 가운데 팔각형은 여전히 서 있습니다.
새로 얹은 것들이 처음의 것을 덮지 않았기에, 이 건물은 여전히 카롤루스 대제의 예배당입니다.